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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실비 제르맹 - <밤의 책> / 문학동네

by pposooj 2026. 4. 6.

밤의 책

실비 제르맹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이제부터 그는 신의 분노와 잔혹함의 전달자였다.

 
<밤의 책>은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페니엘 가문을 관통한 전쟁과 고난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역사서설이라기보단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보불전쟁과 제1,2차 세계대전이라는 굵직한 시대적 배경을 깔고 있으면서도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진 듯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읽는 내내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작인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에게 <백 년의 고독>은 아주 특별한 책인데, 솔직히 다 이해하면서 읽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마음 깊은 곳에 남았다. <밤의 책>또한 이해보다는 감각으로 찾게 되는 문장들. 그냥 곁에 두고 싶은 마력이 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책이 데뷔작이라니.. 
 
이 책의 이야기를 하자면 <호박색 밤>을 빼놓을 수 없는데, 나는 아직 <호박색 밤>은 읽지 못했다. 대여를 할까 구매를 할까 망설이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밤의 책>은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몇페이지 읽다가 후다닥 주문을 해버린 케이스라, <호박색 밤>은 처음부터 새책으로 읽고 싶은 맘에 아마 조만간 구매를 하지 않을까... 
 
리뷰를 하기전 정보를 검색해 보던 중,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도 이 작품과 비슷한 인상이라는 평을 보았다. 왠지 곧 읽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읽고 싶은 책은 많아지는데 속도는 늘 제자리라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행복한 고민이다.
 


 

그는 더이상 알 라 그라스 드 디외호의 주인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그는 신의 분노와 잔혹함의 전달자였다. (p.60)

 

난 네게 줄 게 아무것도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남겨질 얼마 안 되는 것이 고작이다. 내 미소의 그림자뿐이다. 그 그림자를 가지고 가라. 가벼운 것이라 짐이 되지 않을 거다. 그러면 나는 너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너를 가장 변함없이 사랑하는 이로 남을 거다. 그래, 그 사랑을 네게 유산으로 주마, 그건 나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넓은 것이란다. (p.82)

 

죽는 날까지 그는 영원히 자기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을 터였으니, 이제부터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거울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p.105) 

 

그러한 위협은 다른 어떤 짐승을 향한 것도, 심지어 사람들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이 언제나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 인간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고생스럽게 이룩해놓은 행복을 감히 단 한 번의 뒷발질로 망가뜨려놓는 꼴을 발밑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뿐이었다. (p.154)

 

그 시절에 페니엘네 집안사람들은 완전히 땅에 붙어사는 사람들, 속속들이 안개와 비에 젖은 채 곳곳에 어두운 숲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가 하면 탁한 잿빛의 강물이 구불구불 흘러가며 후벼내는, 속병 든 땅의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 그러나 저 물 위의 하늘은 그들이 아직 민물의 사람들이었던 시절과 다름없이 언제나 그대로였다. (p.359)

 

그는 반항조차 하지 않았고 더이상 신에 대한 분노도 증오도 느끼지 않았다. 무슨 소용인가. 결국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하늘은 땅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으니 말이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리고 이제는 그의 눈앞에서 조용히 불타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 이외에 다른 신은 없었다. 그는 서서히 잿더미로 변해가는 신의 변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