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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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대해 인간들은 무얼 아는가? 침입자가 되어 그 안에 스며들 뿐
역사의 잔혹한 풍랑 속에 비극을 겪었지만, 끝내 역사가 아닌 사람들.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지만, 저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 같은 욕망과 열정과 사랑을 품고, 또 저마다의 비극을 평범함이라는 침묵 속에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겨진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말하는 ‘숨겨진 삶’은 소설 속 몇몇 인물의 특별한 삶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삶, 그리고 어쩌면 삶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처럼 느껴졌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조용해 보여도 한 사람의 내면에는 끝내 다 말해지지 않는 열망과 슬픔, 상처와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생각하게 만든다.
《밤의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이어 읽게 된 실비 제르맹의 소설 《숨겨진 삶》. 문장 하나하나가 과연 실비 제르맹이다 싶을 만큼 시적이고 강렬했다. 읽는 내내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문장은 단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감각을 뒤흔들고, 장면을 눈앞에 밀어붙이고, 어떤 문장 앞에서는 거의 숨을 멈추게 만든다. 어둡고 축축하고 그로테스크하다가도, 동시에 관능적이고 신비롭고 뜨겁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감각들이 한 문장 안에서 함께 살아 움직이는데, 그 밀도와 강렬함이 정말 압도적이었다. 확실하게 나는 이 작가에게 사로잡혔다. 책장에 아직 읽지 못한 실비 제르맹의 책이 몇 권 더 남아 있지만, 이제는 어디 가서 좋아하는 작가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좋아한다는 말보다도, 이 작가의 문장을 계속 읽고 싶다는 마음에 더 가깝다.

아무렴, 벼룩 한 마리가 흑사병이나 티푸스를 퍼뜨리고말고.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재채기 한 번으로 산사태가 날 수도 있지. 복권 한 장이 사랑을 파괴하고, 말 한마디가 무사태평한 기쁨과 신뢰를 단번에 사라지게 하고, 한순간의 부주의가 파리채로 파리 잡듯 한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지. (40)
마리는 지구의 심부에 자리한 이 마그마가 점액질의 거대한 심장, 우렁차게 울리며 빛을 발하는 검붉은 심장 같다고 상상한다. 찰랑대고 윙윙대고 둔탁한 소리로 으르렁대며 녹아 발효해가는 심장. 태곳적부터 이 땅에 머물렀던 광물과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 육신의 잔재들이 한데 뒤섞인 심장. 아버지의 육신도 이제 그곳에서 용해되어간다. 갈가리 찢긴 한줌의 살과 뼈는 검붉은 액체가 되어버린 무수한 물질들과 뒤섞여 비계와 체액과 수액, 양 기름과 피, 폭풍우와 불의 냄새를 풍긴다. (63)
"난 오래전부터 요다음에 크면 나무가 되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책이 되고 싶어요. 한 장 한 장을 바람과 벌레, 햇빛과 비, 새와 달빛으로 쓴 나무책이요. 봄이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져 여름에 빛을 발했다가 가을이면 잎이 떨어지고 겨울이면 사라지겠죠. 그렇게 끝없이 다시 시작될 거예요." (100)
죽은 자는 잠을 자는 것도, 꿈을 꾸는 것도 아니다. 겉보기에 그는 철저히 부재하며 무감각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렇다고 시신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동하는 중이다. 발견하는 중이다. 그는 또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중인, 살아 있는 사람이다. (135~136)
어둠에 대해 인간들은 무얼 아는가? 침입자가 되어 그 안에 스며들 뿐 (174)
사빈은 시간으로부터, 타인들과 자신으로 부터 한발 물러섰다. 그 모두를 더 깊이 있게 관조하고, 그 흐름과 견고함과 응집력을 헤아리고, 미지의 부분을 더 잘 탐색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저 살아 있음의 맛 자체를 음미했다. (193~194)
그렇다, 무한한 자유는 위험천만한 독이요 화약고다. 자유는 교묘한 통제와 제한이 가해졌을 때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조르주가 그토록 사랑한 '속도'와 흡사해서, 조르주도 그걸 통제하지 못한 순간 죽음을 당한 것이다. (200)
세월과 더불어 광채를 잃어가는 노란 포스터. 하지만 로스코의 이 복제화는 색이 바래버린 지금도 앙리에게는 세상을 향해 열린, 탐색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다. 이 그림 역시 숨겨진 삶이 식별되고 감지되게끔 하기 위해 한 사람이 애쓴 자취였다. (220)
그는 무한히 팽창하고 변화하는 경이로운 그림의 테두리 안에, 가시 세계의 광휘 속에 서 있다. 생살을 드러낸 삶 자체인, 눈이 부시도록 헐벗은 욕망 속에 들어 있다.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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