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지지 않는다
클라라 뒤퐁 모노 (이정은 옮김) / 필름 출판사
💭
전쟁은 어떤 관계다. 슬픔도 그렇다.
한 가족에게 ‘부적응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어떤 설명이나 판단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보다, 산맥이나 돌멩이, 개울이 그저 거기 있듯이 존재한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약속하지도 않으며, 다만 자연처럼 자기 방식으로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가족들에게 더 큰 질문이 된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보다 결국 순응하고 학습하며 살아가듯이, 가족들 역시 아이를 자신들의 삶에 끼워 맞추려 하기보다 아이가 있는 삶 자체에 적응해 나간다. 그 과정이 아름답게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다. 아이는 아무런 악의 없이 가족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가족들은 그 고통 속에서 흔들리고 지치고 버티며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특별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적응해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아이가 죽은 뒤에도 아이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그 부재로써 또다른 형태의 존재가 된다. 가족들의 일상 곳곳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더 깊이 머무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아이가 죽은 후 태어난 막내는 정작 자신만 알지 못하는 그 존재를 그리워하며, 보지 못한 아이를 상상하고 그 삶에 공명한다. 한 가족 안에서 누군가는 실제의 기억으로, 누군가는 상상과 전해 들은 감각으로 같은 존재를 품고 살아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방식이 꼭 직접 겪은 시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오래 남았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의 존재를 늘 느끼며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나는 유독 막내의 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다른 가족들이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의 기억을 안고 있다면, 막내는 오히려 떠나버린 존재를 더듬어 상상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 상상은 실체가 없어 보이지 않는다. 아이의 흔적이 가족 안에 여전히 남아 있고, 그 흔적을 따라가며 그 사람을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대로 받아들이든지 버리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곳에서 사는 것은 곧 혼돈을 견뎌냄을 뜻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부모는 다리의 난간에 걸터앉은 채 자신들의 삶에 그 원칙을 적용해야 할 거라고 느꼈다. (20)
맏이는 자신이 순수함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아이 곁에 있을 때면 더 이상 삶이 자신에게서 달아날까 두려워서 삶을 거칠게 다루려 하지 않았다. 삶은 겁내지도, 맞서 싸우려고도 하지 않고 그의 숨결이 가 닿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31)
그들이 부서지기 쉽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보다 더 굳건한 존재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운명을 약삭빠르게 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운명에 도전하지 않는 지혜를 지녔다. 그들은 몸을 굽히지만, 그 뒤에서 적응한다. 위안 받을 자원을 비축해 두고, 저항을 조직하고, 에너지를 아끼고, 고통을 좌절시킨다. 맞서지 않고 함께한다. 나는 그렇게 할 줄 모른다. (115)
“어떤 아이가 아프면, 항상 다른 아이들도 잘 살펴야 해.(…) 왜냐하면 건강한 애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자기한테 주어지는 뾰족한 삶의 윤곽에 적응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고통의 모양새에 제 몸을 맞추니까. 그 애들은 파도라면 질색이지만 거부한다면 적절하지 못할 테니 어쩔 수 없이 등대를 지키는 존재일 거야. 어떤 의무감이 그들을 이끌어. 그들은 캄캄한 밤중에 바다를 살피며 그곳에서 버티면서, 춥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쓰겠지. 하지만 좁지도 누렵지도 않은 건 정상이 아니야. 그들에게 다가가야 해.” (128)
붕괴는 가끔 자신이 뒤덮고 있는 것과 정반대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절망은 단단함으로 변한다. 바로 그런 일이 생겼다. 한바탕 때리고 싶은 마음, 충동, 부글거리는 분노, 누이의 마음을 세차게 두드리던 그 모든 물결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곳에 차가운 사막이 들어섰다. (147)
채색된 영상이 움직이며 빛나는 어슴푸레함 속에서 그녀는 갑자기 맏이가 아이로부터 치유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유되는 것은 곧 자신의 고통을 포기함을 뜻하는데, 아이는 바로 그 고통을 맏이의 마음속에 심어 놓았다. 치유되는 것은 곧 흔적을 잃는 것, 아이를 영영 잃음을 뜻했다. 누이는 이제 관계가 서로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전쟁은 어떤 관계다. 슬픔도 그렇다. (159)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고,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어줄 수 있으며, 위험이 닥칠 것을 기다리면서 두 주먹을 꽉 쥔 채 살아서는 안 된다, 라고 누이는 말했다. 바로 이것이 그 사랑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이고, 큰 오빠가 배우지 못하는 것이라고. 오빠는 포기했으니까, 라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203)
막내는 자주 소리에 집중하려고 눈을 감았다. ‘작은 마법사, 네가 아니었더라면 더욱 잘 보려고 눈을 감을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막내는 생각했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 동반자였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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