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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김선오 - <미지를 위한 루바토> / 아침달

by pposooj 2026. 4. 16.


미지를 위한 루바토

김선오 / 아침달


💭

입증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의 매혹 앞에 자꾸 무릎 꿇게 되는 것. 아름다움의 권능에 복종하여 논리와 체계 앞에서 눈을 감는 일. 시와 철학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각자 다른 신에게 복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와 친하게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다(조금이나마 친해졌다는 것도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지만). 여전히 나는 시 앞에서 조금 머뭇거리는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제대로 읽어본 시집도 아직 많지 않다. 대신 시인이 쓴 산문은 꽤 읽는 편이다. 시를 어려워하는 나에게 시인의 산문은 시와 나 사이의 심적 거리감을 조금 좁혀주는 매개처럼 느껴진다. 시에서는 단번에 닿지 못했던 문장이 산문에서는 조금 더 뚜렷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시인이 언어를 대하는 태도를 먼저 이해하게 되는 점이 좋다. 그래서 산문이 좋았던 시인의 시집은 꼭 찾아 읽게 되더라. 이번 산문도 그랬다. 읽는 내내 김선오 시인의 시를 찾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조금 일반화해보자면, 시인의 문장은 어딘가 슬프다.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시인이라는 사람들은 일상 곳곳의 슬픔 또는 고통 마저도 아름답게 빚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고 감히 일반화 해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부분이 결국 공감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그 안에 늘 조금의 상실이나 결핍, 혹은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흔들림이 함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존재하는 시가 존재하지 않는 시보다 좋을 수 있나. 시를 쓰며 종종 하는 생각이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세계의 알 수 없는 입자들로 존재하던 시절보다, 또 죽음 이후 육체라는 집합으로부터 탈출하여 다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게 될 미래보다 좋을까.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어 있는 | 21)

 

물성에 도달하는 순간, 시에게 구채적인 언어가 생기는 순간(언어는 시의 몸이기도 하므로) 시는 무존재의 자유와 영원한 안식을 상실하고 세계의 구체적인 활자로서, 혹은 누군가의 목소리로서 존재하게 되고, 소통하고 매개하고 기능하며, 이렇게 정체를 드러내는 대가로 자신의 좋음을 일부 탈취당하는 것이 아닐까.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어 있는 | 22)

 

나는 시의 초고를 쓴 후에 오랜 시간 퇴고를 하고는 하지만, 격렬한 퇴고 과정 이후에도 결국에는 초고의 형태와 내용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잦다. 왜냐하면 퇴고는 대체로 루바토를 깎아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시가 주동하는 대로 빼앗기거나 빼앗은 언어를 규범대로 되돌리는 동안 시는 자신이 가진 미지를 잃는다. 더 정확히 구조화되기 위해 여분의 언어가 절단되는 순간, 시가 가진 에너지는 급격히 줄어든다. 손상되지 않은 초고에는 자연스러운 루바토가 있다. 언어의 질서로부터 자신도 모르게 달아나버리는, 그로 인해 어떤 새로움을 발생시키는, 어쩌면 단어의 바깥으로 단어의 의미가 늘어나거나, 반대로 세계의 좁고 내밀한 곳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축소되어버리는. (미지를 위한 루바토 | 65)

 

입증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의 매혹 앞에 자꾸 무릎 꿇게 되는 것. 아름다움의 권능에 복종하여 논리와 체계 앞에서 눈을 감는 일. 시와 철학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각자 다른 신에게 복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녹 | 83)

 

이 고요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애도와 슬픔을 나눈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는 웃음이 다른 종류의 것임을 느낀다. 웃음이 멈춘 자리에서 발생하는 고요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아는 이들이 웃을 때 이 웃음의 메아리는 울음에 가깝다. (팬데믹 |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