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사색
헤르만 헤세 (배명자 옮김) / 반니
💭
아, 너무나 느리게 가는 긴긴밤이여.
밤이라는 시간은 신비롭다. 상상력이 전무한 나 같은 사람도 방에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으면 조용히 사색에 빠진다. 낮에는 잘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이 밤이 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 언제인지 모를 과거의 내 모습을 되새김하며 몰려오는 수치심 같은 것들. 그런 생각들은 굳이 불러내지 않아도 밤이 되면 저절로 떠오른다. 어두운 밤에 나는 나에게서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 솔직해지는 시간 같기도 하고, 그래서 더 불편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생산성 없는 자기 비하의 시간에 읽기 좋은 책이다.
짧지만 가볍지 않은 산문과 일기, 시가 엮여 있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한두 장씩 책장을 넘기다 보니 명상하듯 마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길지 않은 글들이라 부담 없이 읽히지만, 읽고 나면 생각이 잠시 멈추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더 천천히 읽게 되고, 그만큼 더 오래 머물게 되는 문장들이 있다. 특히 ’외로운 시간을 정적 속에서 보내본 사람만이 따뜻한 시선과 사랑으로 사물을 가늠하고 영혼의 바탕을 보고 인간적인 모든 약점을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문장을 읽고,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느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지금의 시간들이 전부 무의미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 이 책을 골랐던 진짜 이유는 팔 할이 표지 때문이다. 깜장냥이 ... 어케 참는데😫 처음엔 그냥 표지에 끌려서 집어 들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선택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가끔은 이유 없이 고른 책이 의외로 오래 남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각에 잠기는 외로운 시간을 정적 속에서 보내본 사람만이 따뜻한 시선과 사랑으로 사물을 가늠하고 영혼의 바탕을 보고 인간적인 모든 약점을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잠 못 이루는 밤 | p.20)
아, 너무나 느리게 가는 긴긴밤이여. 그곳에서 우리의 가장 진실한 자아는 화려한 낮의 가운을 벗고 의문과 간청과 비난의 이불을 덮고 누워 아픈 아이처럼 뒤척인다. (불면증 | p.24)
아테나 여신이 갑옷을 입은 채 제우스의 머리에서 튀어 나오듯 완성된 시가 머리에서 나오는 시인은 없다고 생각해요. 시 한 구절이 얼마나 많은 영혼과 얼마나 많은 붉은 심장의 피를 마셔야 제 발로 홀로 서서 걸을 수 있는지 나는 알아요. (불면증 | p.44)
인간 정신이 발명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이다. 시간은 참으로 정교하면서도 묘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더욱 깊은 고통을 주고, 세상을 더 힘들고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은 오직 시간 때문에 자신이 갈망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 된다. 오직 시간 때문에, 이 고약한 발명품 때문에! 자유롭고 싶다면 무엇보다 바로 시간이라는 목발부터 던져버려야 한다.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두려움 극복 | p.71)
절망이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하려는 진지한 노력의 결과이다. 절망이란, 덕을 쌓고 정의롭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며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려는 온갖 진지한 노력의 결과이다. 절망의 이편에는 아이들이 있고, 절망의 저편에는 깨달은 자들이 있다. (언제나 새롭게 | p.86)
날마다 작은 기쁨을 가능한 한 많이 경험하라. 많은 준비를 요구하는 거창한 쾌락은 휴가 때나 조금씩 나누어 인색하게 누려라. (...) 일상의 피로에서 벗어나 지친 몸을 추스르게 하는 것은 거창한 쾌락이 아니라 작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작은 기쁨 | p.110)
저녁이 따스하게 감싸주지 않는 / 뜨겁기만 한 가혹한 낮은 없다. / 무자비하고 사납고 소란스러웠던 날도 / 어머니 같은 밤이 포근히 감싸주리라. (절대 잊지 마라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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