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 민음사
💭
산과 나는 이제 슬픈 마음 없이도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었다.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사소해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인 이해에 관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이 책의 인물들은 일상 한가운데에 예기치 않게 판타지적인 순간이 끼어들어도 크게 놀라거나 그 상황을 밀어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맞서 해결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낯선 일들을 자기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오래 들여다본다. 그래서 이 소설집이 좋았다. 특별한 사건이 인물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은 마음의 움직임과 그로인해 쌓인 이해가 사람을 조금씩 다른 자리로 옮겨놓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읽고 나면 거창한 교훈보다도,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결국 자기 안의 낯선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오래 남는다.
여러 곳에서 이 소설집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도서관에 갔다가 눈에 띄어 이참에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빌려왔다. 기대를 너무 크게 하면 실망할 때도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부담 없이 펼쳤다가 생각보다 훨씬 깊게 마음에 남았다. 전반적으로 아주 따뜻한데 그렇다고 마냥 가볍거나 포근한 쪽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다정한 시선 아래에도 외로움과 체념, 상실과 그리움 같은 감정들이 얇지 않게 깔려 있어서 읽는 동안 자꾸 마음이 멈추곤 했다. 그러면서도 문체 곳곳에 배어 있는 능청스러움 덕분에 몇 번이나 픽픽 웃게 되었고, 그 균형감이 특히 좋았다. 따뜻하지만 느슨하지 않고, 슬프지만 무겁게 가라앉지만은 않는 감정의 결이 이 책의 매력처럼 느껴졌다. 나는 수록작 중 표제작인 <유령의 마음으로>와 <여름은 물빛처럼>,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팡>을 특히 재밌게 읽었다.

기적을 바라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나는 매장을 청소하며 생각했다. 실망이 쌓이면 분노가 되고, 분노는 결국 체념이 되니까.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유령의 마음으로, p.24)
나는 유령의 우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이 전부 그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유령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에 닿지는 않았지만 분명 따뜻했고,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울 수 있었다. (유령의 마음으로, p.28)
사람들은 역시 겁이 많다. 어쩌면 해파리들에게 신, 좀비, 세계 멸망 같은 의도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최선을 다해 반짝이고 있을 뿐일지도. 문제는 해파리가 아니라 사람들이다. 누구에게나 어둠은 무서우니까, 자신의 어둠조차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빛에 다가서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빛이 나지 않아요, p.60)
흐르는 물을 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은 기분. 산과 나는 이제 슬픈 마음 없이도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었다. (여름은 물빛처럼, p.101)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함께 무언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더디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지나,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그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낯선 밤에 우리는, p.138)
동그랗게 만 수건 두 개를 끌어안은 밤, 나는 사랑하는 일은 왜 이렇게 쉬울까. 왜 이렇게 어려울까,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알래스카는 아니지만, p.218)
내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에 빠지고 있었고, 누군가를 미워했으며, 때때로 죽고 싶어 했다. 그런 마음들은 어째서 지치지도 않고 계속 이어지는 걸까. 그것을 생각하자 그만 아득해져 이미 죽었는데도 또 한번 죽고 싶었다.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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