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하고 바라옵건대
김보영, 이수현, 위래, 김주영, 이산화 / 안전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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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스러운 짐승을 일컫는 ‘신수’를 주제로 한 다섯 개의 소설이 담긴 앤솔로지였다. 평소 김보영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터라 냉큼 골라 왔는데 다섯 작품 모두 기발하고 개성 있는 이야기였다. 익숙한 호랑이와 용뿐만 아니라 맥, 진묘수, 곤과같이 조금은 생소한 신수의 존재도 흥미로웠고 신화스럽기도 하고 SF스럽기도 한 동양풍 판타지의 기묘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즐겁게 읽었다.
<산군의 계절>과 <맥의 배를 가르면>, <죽은 자의 영토>가 특별히 재미있었는데, <산군의 계절>은 산군 밀우가 후녀를 키우며 정이 드는 과정, 연나의 모계 설정 등이 흥미로웠고 <맥의 배를 가르면>은 맥의 배 속에서 튀어나온 꿈이 현실과 뒤섞인 세계의 묘사, 죽고 싶어 하는 나와 살고 싶어 하는 서생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또 <죽은 자의 영토>는 역동적인 이야기가 마치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이겼다. 네가 이겼고 우리가 다 졌다. 그 길었던 혈통의 전쟁도, 여러 세대에 걸친 가문의 염원도, 그토록 많은 이들이 해 온 음모와 암투도 다 모래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내가 2백여 년간 싸워 온 일도, 열망했던 꿈도, 애태웠던 바람도, 네 살고자 함 앞에 다 헛일이 되고 말았다. 아,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김보영 <산군의 계절> | 49)
용은 신령한 동물이라, 태생이 아니라 화생한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여 만들어진다. 그리고 변화하려면 방향이 필요했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정하는 의지와 감정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영기를 모으는 것만으로는 마지막 도약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먼저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용아의 자아와 의식은 오직 그것을 위해 존재했으니, 모든 것이 변화할 때 같이 벗어 버릴 껍질일 뿐. (이수현 <용아화생기> | 94)
”이 현실에 환상 속의 동물이 존재하게 되면 안 되니까요. 맥은 자신의 존재마저도 먹어 치워 한낱 짐승이 되어 자신이 강대한 존재였다는 사실도 잊었지요. 하지만 그건 인간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허락된 꿈만을 꾸면서 철창에 갇혀 정해진 밥만 먹는 짐승이요. 우리는 맥의 배를 갈라서 모든 꿈을 쏟아 내게끔 해야 됩니다.“ (위래 <맥의 배를 가르면> | 109)
진묘수의 임무는 산 자가 죽은 자의 안식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대개 죽은 자가 한이나 미련을 품어 이승을 떠돈다고 믿지만, 실상은 반대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모든 인연과 욕망을 죽으면서 완전히 끊어 버린다. 이미 죽은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에 어떤 감흥도 없었다. 오히려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미련이나 한과 그리움이 죽은 자를 이승에 붙들어 놓으면서 완전한 안식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진묘수의 임무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그리움과 한을 정화하는 거였다. (김주영 <죽은 자의 영토> | 147)
하나하나가 먼지만큼이나 작아 눈에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는 미물들이, 곤의 비늘 틈에 사는 철어의 몸에 붙은 따개비의 주둥이에 둥지를 튼 달팽이의 뿔 위에서, 자기들이 구름 속에 있는지 바다 위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계속 바글바글 무리 지었다가 도망쳤다가 하는 것이었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그 모습을 한없이 응시하고 또 응시하던 흑삼릉이, 불현듯 깨우치는 바가 있어 속으로 가만히 혼잣말했다. ‘가장 커다란 곤의 일곱 배라. 저 작은 달팽이조차도 그 뿔에 빌붙은 게의 일곱 배보다는 훨씬 클 터인데, 고작 일곱 배라….’ (이산화 <달팽이의 뿔> |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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