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 난다
💭
사실 죽음과 관능은 어쩌면 서로 떨어진 독립적인게 아니고 한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2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책인데도 쉽게 넘어가지지 않았다. 좋은 문장이 많아서라기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 깊게 박혀서 자꾸 멈추게 되는 책이었다. 발췌하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았지만, 몇 줄만 긋고 지나가기에는 한 페이지 전체가 통째로 마음에 남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밑줄을 치지 못한 페이지가 많았다. 이 책은 죽음과 불행, 상처와 고통, 고독 같은 어두운 감각을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고 나면 완전히 어두운 마음만 남지는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통과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애정이 책 전체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고통, 고독을 무심히 끌어안으면서도 시인은 주저앉지 않는다.
“시인이라면 모두가 최승자처럼 살고 쓰고 해보리라는 가느다란 꿈이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결코 그러하지 못하리라는 기묘한 자괴와 안정을 곧잘 느꼈으리라. 동거할 수 없는 감정을 당신에게서 느낀다.” 서효인 시인이 최승자 시인에 대해 남긴 글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지만, 누군가의 문장을 읽으며 닮고 싶다는 마음과 끝내 그렇게는 못 살 것 같다는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이 분명 있다. 존경과 두려움, 공감과 막막함이 같이 오는 감정. 쉽게 함께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음들이 이상하게도 한 사람 앞에서는 동시에 가능해지는 경험이 있는데, 최승자의 글이 내게도 그랬다. 읽는 내내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함부로 가까워질 수는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14)
내 인생은 언제나 예감 혹은 암시에 앞이마가 얻어터지고, 기억에 뒷덜미를 물렸다. 앞으로도 얻어맞고 뒤로도 얻어맞고, 겉으로도 얻어맞고 속으로도 얻어맞았다. 홍, 내가 동네북인 줄 아느냐. 얻어터지기만 하는 게 괴로워서 나는 정말로 내 머리통을 뽀개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24)
어쩌면 나는 삶의 편에서 죽음을 짝사랑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죽음의 감각을 산산이 깨뜨려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와 각오를 갖게 해준 것이리라. (53)
어쩌면 나는 삶의 편에서 죽음을 짝사랑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죽음의 감각을 산산이 깨뜨려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와 각오를 갖게 해준 것이리라. (53)
아마도 인간은 상처투성이의 삶을 통해 상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모순의 별 아래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상처 없는 삶과 상처투성이의 삶. 꿈과 상처.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더욱 굳건하게 받쳐주는 원리, 한 몸뚱이에 두 개의 얼굴이 달린 야누스의 원리이다. (59)
우리 존재의 바탕에 자리잡은 공포는 우리의 저 깊은 안쪽에서 보이지 않게 우리를 조종하면서 우리 삶을 이끌어가고, 그 궁극적인 목적지는 죽음이며, 거기까지 가는 동안 많은 죽음의 형식을 실험 하고 시연하지.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공포가 꽃수레에 올라타고 자신의 목적지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인지도 몰라.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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