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정세윤 옮김) / 구픽
💭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 보았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묘사가 너무나 디테일하고 생생하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안장에 쓸린 다리의 통증과 지독한 갈증, 들소 사체에서 풍겨오는 썩은 악취, 들소 가죽을 비집고 들어오는 차디찬 눈과 강추위를 몸소 겪는 듯했다. 읽는 내내 단순히 장면을 상상하는 수준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 강해서 더 깊이 몰입하게 됐다.
서부가 주 배경이어서 그런지 얼마 전 읽은 핏빛 자오선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핏빛 자오선이 인간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면 부처스 크로싱은 낙원과도 같은 모습 이면에 무자비함을 품은 대자연과, 욕망 앞에 드러난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 그리고 그 안에서 처절하게 생존하려 했으나 결국 통제할 수 없는 삶을 맞닥뜨린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떠나는 인간의 모습이 남아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됐다.
세밀하게 장면을 묘사하는 문체에 있어서 다소 지루하다는 평이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런 문체가 취향에 맞는 것인지 과몰입하며 읽었다. 한 장면 한 장면을 따라가다 보니 오히려 그 느린 호흡이 더 잘 맞는 느낌이었다. 작가의 대표작인 스토너도 아직 읽지 않은 상태인데 기대감이 훅 높아졌다. 스토너 어서 내 장바구니로🤑

그는 생각했다. 이쪽에는 도시가, 저쪽에는 자연이 있지. 도시로 돌아가야만 하더라도, 다시 점점 더 멀리 떠나기 위해 돌아갈 뿐이야. (62)
일행은 해가 지며 어둠이 빠르게 내려도 계속 전진했다. 등 뒤에서 달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앤드루스에게는 그 달이 자신들이 작고 흐릿하며 평평한 땅 위에서 전진하고 있다는 환상에서 헤매지만, 사실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불안해하고 있다는걸 보여 주는 듯했다.(93)
시간의 흐름은 그와 동행하는 세 사람의 얼굴에서, 그리고 스스로 의식하는 자기 내부의 변화에서 드러났다. 그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비바람에 노출되어 거칠어졌다. 얼굴 아래쪽에 까칠하게 자란 수염은 피부가 거칠어지면서 부드러워졌고, 손등은 햇볕에 타 빨개졌다가 갈색이 되었다가 까매졌다. 몸이 점점 여위고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가끔 자신이 새로운 몸, 또는 비현실적인 부드러움과 창백함과 매끄러움의 층 아래 숨어 있었던 진정한 몸 안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108)
밀러의 들소 사냥은 피에 대한 굶주림, 가죽 또는 가죽이 가져다줄 무언가에 대한 욕망, 또는 심지어 밀러 안에서 음울하게 작동하는 맹목적인 분노가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그 것은 밀러 자신이 빠져 있는 어떤 삶에 대한 냉정하고 무심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밀러를 따라 계곡의 평지 위를 멍하게 기어 가며 밀러가 쓴 탄피를 줍고, 물통을 끌고, 총을 손질해 청소한 다음 밀러가 필요할 때 건네주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 보았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171)
들소에게서 도망친 이유는 피와 악취, 흘러나오는 내장에 여자처럼 욕지기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겨우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고 고귀하며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했던 존재가 이제 속절없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죽은 고깃덩이가 되어, 존재 자체 또는 그 존재에 대한 앤드루스의 개념을 완전히 빼앗긴 채 기 괴하게 조롱하듯 눈앞에 걸렸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도망쳤다. 그것은 들소 자신도, 앤드루스가 상상했던 들소도 아니었다. 그 들소는 살해당했다. 앤드루스는 그 살해를 통해 자기 안에 있던 무언가가 파괴되는 걸 느꼈다. 그걸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188)
“자네는 거짓 속에서 태어나고, 보살펴지고, 젖을 떼지. 학교에서는 더 멋진 거짓을 배우고. 인생 전 부를 거짓 속에서 살다가 죽을 때쯤이면 깨닫지. 인생에는 자네 자신,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었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자네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 거짓이 자네한테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지.” (306)
“서부는 오래 있을수록 감당이 안 돼. 너무 크고 너무 텅 비었어. 그리고 거짓이 자네에게 찾아오게 하지. 거짓을 다룰 수 있기 전에는 거짓을 피해야 해. 그리고 더는 꿈같은 건 꾸지 말게. 난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밖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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